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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밥솥을 한번 떠올려 보라. 십중팔구는 국산 중견기업 쿠쿠(CUCKOO) 제품이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해외로 나가 명품 백이 아닌 밥솥을 사 들고 왔다. 일본제 코끼리 밥솥이었다. 밥솥에 대한 주부들의 로망이 얼마나 컸는지, 누구는 양손도 모자라 하나는 발로 툭툭 차며 들어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대세를 바꾼 건 쿠쿠였다. 20년 간 대기업에 납품만 하던 밥솥 회사. 그러다 98년 4월 자체 브랜드로 제품을 처음 내놨고, 불과 1년3개월 만에 업계 1등으로 올라섰다. 이젠 시장의 70%를 장악한다. 정작 궁금한 건 이제부터다. ‘밥솥 지존’에 오른 쿠쿠가 어떻게 신화를 이어갈까. 서울 논현동 본사에서 구본학 대표를 만난 이유였다.
글=이도은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박종근 기자 <[email protected]>
OEM회사, 수주 줄어든 위기가 새 출발점
1m84㎝ 키가 유난히 훤칠해 보이는 구 대표의 나이는 불과 마흔셋이다. 창업주 구자신 회장의 장남, 말 그대로 오너 2세라서다. 미국에서 공부(일리노이대 회계학)하고 회계사로 일하던 중 1996년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입사했다. 때 이른 경영수업 차원은 아니었다. 앞이 안 보이는 회사를 살려내기 위한 부친의 SOS(긴급도움요청)였다. 당시 회사는 쿠쿠가 아니었다. 78년 창립된 성광전기였다. LG전자와 필립스에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으로 밥솥을 납품했다. 한데 외환위기의 전조로 경기가 어려워지니 물량이 30~40%씩 줄면서 타격을 받았다. 자구책이 필요했다. 구 대표는 “뉴욕에서 여피 생활을 좀 만끽해 볼까 싶었는데 2년 만에 짐을 쌌다”고 웃으며 말했다.
●당시 회사가 어땠나.
“성광전기는 88년부터 96년까지 매출 변화가 없었다. 매년 300억원을 꾸준히 냈다. 한데 국내 수주가 줄어드니 갑자기 수출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네가 들어와서 해봐라. 어차피 할 사업이라면’이라고 하시며 불러들였다. 오자마자 해외영업팀장을 맡았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 와중에 새 브랜드를 내놓을 수 있나.
“처음엔 아버지가 반대하셨다.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업도 쉽지 않아서였다. 마침 당시 대기업 계열사 매각 압박이 있어서 LG전자 부품회사가 매물로 나왔다. 아버지는 밥솥 OEM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인수할까 생각하셨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직접 실사단을 끌고 가보니 부품이라는 게 영 흥미가 없었다. 아버지께 20년간 해온 걸 버리고 어떻게 새로운 것을 하겠느냐. 차라리 우리 브랜드로 만들어보자고 설득했다.”
●처음엔 고전했을 것 같다.
“당연하다. 쿠쿠를 아무도 모르니 안 팔렸다. 거기에다 우린 외상을 안 줬다. 현금을 받고 팔았다. 판매업자들이 우리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희한한 회사’라고 했다. 98년 4월에 물건을 처음 내놓고 8~9월까지 바닥을 헤맸다.”
●그런데 어떻게 길을 텄나.
“운이 좋았다. 당시 내가 수출로 환차익을 얻었다. 40여 개 컨테이너 물량을 1달러에 800~900원일 때 계약했는데 2000원까지 올랐다. 아버지께 가서 ‘내가 번 돈이고 그 돈하고 나중에 주실 돈 미리 더 보태달라’고 했다. 광고에 베팅을 해보겠다는 얘기였다. 브랜드를 알리는 노력은 하되 아버지 원칙대로 외상은 계속 안 하는 걸로 했다. 연말까지 딱 5억만 쓰겠다고 말하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오히려 아버지가 5억 갖고 되겠느냐고 하시더라.”
●베팅이 결국 성공했나.
“그렇다. 사업은 운칠기삼이다. 쿠쿠 광고는 못 보던 거라 소비자들이 금세 익혔다. 효과가 나타나니 1년간 20억을 광고에 썼다.”
기술 개발에 승부 걸었다
기술력은 어느 정도 자신했다. 성광전기 때 사건이 전화위복이 됐다. 81년 한 가정집 화재의 원인으로 성광전기가 납품한 밥솥이 지목되면서 제품 6000대가 전량 회수됐다. 이때 회사는 매출 7%를 연구개발에 쏟아 부었고 그 결과 기존에 없던 제품이 만들어졌다. 전기압력밭솥이었다. 구 대표는 이를 두고 “텔레비전으로 치면 브라운관 만들다 LCD를 만드는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브랜드로 나온 제품이 납품 때와는 달랐나.
“전기압력밥솥에다 새 기술을 넣었다. 그런데 1호는 디자인이 너무 구식이어서 팔지도 못하고 2호를 준비했다. 10억 넘게 들어간 돈을 그냥 포기한 거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 같다.”
●기술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있었나.
“원래 성광전기 시절부터 인력의 20%를 연구개발에 뒀다. 그런데 수주량이 줄어드니 개발도 안 하고 노는 사람이 태반이 됐다. 그래도 월급 주고 3차원 그래픽설계(CAD)를 배우라고 했다. 공대생들한테 미술을 시킨 거다. 그것이 나중에 기술 개발자가 디자인을 함께 결합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고. 그때 월급 받고 공부하던 사람들 10여 명이 현재 기술연구소의 핵심 중추다.”
●왜 안 잘랐나.
“우리가 나중에 성장하면 그만 한 인력을 밖에서 구해올 수 있었을까 싶었다. 기업의 성장 속도가 빠르면 인재 채용은 쉽지 않다. 그래서 급하게 성장하면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언젠가 그들이 그 틈을 보완해 준다고 믿었다.”
●너무 교과서 같다.
“나도 안다. 그런데 마마전기·대웅전기를 기억하나. 모두 품질 불량으로 사고가 나면서 크지 못한 경우다. 코리끼 밥솥도 그렇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혁신을 하지 못했다. 쿠쿠는 기술만이 유일한 경쟁력이었다. 99년에 서비스센터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때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쿠쿠 신화는 없었다.”
‘신화’라는 말 그대로 회사는 드라마틱한 성장을 했다. 쿠쿠는 99년 점유율 1위를 달성한 이후 2005년엔 판매 1000만 대, 2010년엔 2000만 대를 돌파했다. 그 사이 대기업이 밥솥 시장에서 철수하는 운도 따랐다. 매출 규모는 4100억원(2011년 기준)을 넘어섰다. 현재 해외 시장에서도 명성이 높다. 중국·러시아·베트남에선 우리가 코끼리 밥솥을 샀던 것과 비슷한 ‘명품’으로 통한다. 중국 현지에서만 600만~700만 달러어치가 팔렸다. 승승장구의 비결이 뭘까. 구 대표는 “중견기업 중에 누구나 히트상품은 낼 수 있다. 문제는 장사가 확 잘되면 경영자가 자기가 잘해서 된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데 투자하거나 축적한다. 전적으로 다시 제품에 투자할 필요를 느껴야 한다”고 설명했다. ‘모범 답안’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잠시 딴죽을 걸어보기로 했다. 사소하지만 까칠한 질문들을 던졌다.
직원들은 힘든 시절 함께한 동지
●너무 잘 만들다가 새로 사는 고객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누가 이제 옷이 뜯어져야만 사고, 휴대전화가 고장 난 후에만 바꾸나. 소비자의 트렌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디자인의 영역이 될 수도 있고. 또 요즘은 세컨드 밥솥을 사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런데 밥솥이 왜 이렇게 비싼가.
“스테인리스 스틸 커버 같은 것도 개발하려면 4~5년씩 걸린다. 들인 돈만큼 가격이 올라가는 거다. 봐라. 싼 것도 있다.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여기 이런 건 6만~7만원이면 산다. 만약 외부 무선 조정 서비스까지 갖춘다면 100만원짜리가 못 나올 이유도 없다고 본다.”
●집에서는 어떤 모델을 쓰나.
“아내가 왜 만날 우리는 시험모델만 쓰느냐고 한다. 한번은 실제 고객서비스를 시험 삼아 불러봤는데 시험모델이라 들킨 적도 있다.”
●요즘에는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추세다. 밥솥 회사엔 위기 아닌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더 이상 밥솥 브랜드가 아니다. 이미 정수기·가습기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쿠쿠를 생활가전 제품 회사로 성장시키고 싶다.”
●그럼 웅진코웨이 매각 소식을 들었겠다.
“뉴스를 보고 나도 놀랐다. 아직 입장 정리는 못하고 있지만 이게 호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
●오너 2세라는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사전 질문을 보고 한참 생각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내 앞에서 아무도 싫어하는 것 같지 않던데.”
●앞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하. 그런가. 초창기 회사가 너무 어려워 사장 아들이 온 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만한 여유도 없었을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힘든 시기를 같이해 나와 동지 의식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나도 그때 회사 일을 많이 배웠다. 극복만 된다면 고난은 가장 좋은 학교임에 분명하다.”
●시장 점유율이 70%다. 내리막만 남지 않았나.
“사업 시작할 때 목표는 생존이었다. 아버지한테도 우리가 3등 정도 하면 먹고살지는 않겠나 했다. 점유율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우리 제품이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불만을 내세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없애는 게 목표다.”
구 대표는 자신이 아버지보다 ‘시장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소비자가 중심이라는 말이었다. “참 흔하게 하는 말인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를 들었다. “가령 우리 회사는 영업사원이 신기술 아이디어를 낸다. 왜 영업사원이 이런 걸 고민하나라고 하지만 이게 현대의 경영이다. 영업사원이 거래처랑 술 먹는 건 옛날 얘기다. 대신 매장에 나가서 소비자의 얘기를 듣고 연구소에 인사이트(insight)를 던져 줘야 한다. 옛날과 달리 모두가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하니까. 다른 분야도 통합·통섭이 대세 아닌가. 그런 간극을 좁혀주는 게 경영자의 역할이다.”
구본학 대표가 지향하는 3무(無) 경영
1. 보고 無
“점유율·매출 등을 따로 보고받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매출을 가지고 질책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고객 입장에선 쿠쿠 밥솥이 몇 개 팔리는지는 관심 없다. 애프터서비스가 잘 되나, 디자인이 예쁜가가 핵심이니 나도 거기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2. 회의 無
“스탠딩 파티를 가보면 안다. 주변은 시끄러운데 한 사람과 하는 대화는 의외로 집중력이 좋다. 2006년 11월부터 대표이사가 되고 나서 월·화·수는 공장이 있는 경남 양산, 목·금은 서울에서 보낸다. 양산에 내려가면 각 부서는 물론이고, 연구소·조립라인을 돌아다니면서 직원들과 얘기한다. 회의할 때보다 이때 나눈 얘기들이 양질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
3. 지시 無
“지시를 하면 대개 4단계에 걸쳐 말이 전달된다. 그러면서 노이즈가 점점 많아진다. 오히려 업무 당사자와 일대일 대화를 하다 보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나중에 실제 일을 추진할 때도 훨씬 빠르다. 서로서로 업무에 대해 배경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2010년 정수기 사업을 시작할 때도 이미 4년 전부터 해당자들과 면담을 해 와서 적응이 빨랐다.”
j 칵테일 >> 북한에서도 ‘보물 밥솥’
쿠쿠의 명성은 북한에도 퍼져 있다. 중국을 통해 들어간 제품들이 평양·평성·함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거래되는 것. ‘보물밥솥’으로 불리며 개당 150~160달러의 고가에 팔리지만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 중에서도 친척들과 돈을 모아 사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북한 전문매체인 자유북한방송도 이를 보도했다. 이 매체는 “평양에서 음성이 들리는 쿠쿠압력밥솥이 잘 팔리고 있다”며 “음성 안내 기능을 북한 주민들이 굉장히 신기해한다”고 보도했다. 쿠쿠 밥솥의 메뉴 중 취사를 선택하면 “백미 취사를 시작합니다”라는 음성이 들리고 밥이 다 되면 “백미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음성이 나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매체는 또 북한 주민들이 이 밥솥을 두고 “남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만하다”고 평한다고 전했다.
>> ‘쿠쿠하세요, 쿠쿠’ 음계는?
쿠쿠 광고는 화면보다 소리로 기억된다. 바로 ‘쿠쿠하세요, 쿠쿠’라는 슬로건 덕분이다. 한때는 이와 관련된 고객의 문의 글이 넘쳐났었다. 그 가운데 “쿠쿠하세요 쿠쿠”에서 마지막 쿠쿠의 음이 같은지 다른지를 알려달라는 고객도 있었다. 친구와 내기를 했다며 정답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었다. 광고 담당자에게 확인해 본 결과 정답은 ‘다르다’였다. 슬로건의 음계는 ‘미미파라솔, 솔미’였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소통이다. 일찌감치 내부 전자결제 시스템에 ‘고객의 소리’ 코너 만들어놓은 것도 그래서다. 고객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으니까. 더구나 요즘은 소통이 화두가 된 시대다. 사내 경영도 그렇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경영자와 근로자가 정말 말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잡곡·쌀밥 분리대, 분리형 커버 … 고객의 소리가 제품으로
쿠쿠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고객센터’ 코너가 있다. 클릭하면 문의사항은 물론 각종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데, 웬만한 소비재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서비스다. 하지만 처리 과정은 남다르다. 구 대표는 이를 고과와 연계시켰다. 일단 과장 이상이면 누구나 그 내용을 볼 수 있게 했고, 담당자가 해결까지 24시간을 넘기면 연말 고과에 반영하도록 했다. “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처리 속도를 월별, 연별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구 대표는 “게다가 업체의 즉각적인 반응에 열혈 고객들이 아이디어를 속속 내놓으면서 실제 개발로 이어진 경우도 많다”고 자랑했다.
① 패킹워시 분리형 커버 : 밥솥 뚜껑을 떼어내 씻고 싶다는 주부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② 쿠쿠 나누미 : 남편을 위해 잡곡밥, 아들을 위해 흰 쌀밥 등 하루 두 번씩 밥을 한다는 주부의 글에서 착안해 내솥 중간에 분리대를 넣었다.
③ 소프트스팀캡 : 취사가 끝나고 김이 빠지면서 나는 소리에 아기가 깨거나 깜짝 놀란다는 엄마들이 꽤 됐다. 이중 스팀캡으로 압력을 차단하고 증기가 나가는 힘을 줄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④ 남성 음성 선택 :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같은 말이 꼭 여자 목소리로 나와야 하나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성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여자들을 위해 남성 음성을 추가했다.
밥 짓는 물, 손 말고 눈금으로 맞추세요
구본학 대표에게 실제 밥을 잘 짓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집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직접 밥을 지어 본다”며 “밥에 관한 미각은 남다르다”고 자랑했다. 내친김에 “손대중을 잘 맞추는가 보다”고 추임새를 넣었는데 “밥물은 절대로 손으로 맞추면 안 된다. 눈금대로 하는 게 가장 맛있다”고 정색하고 말했다. 밥솥에 관한 한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밥물 눈금을 꼭 지켜야 하나.
“눈금은 가장 맛있게 밥이 되는 물의 양을 수없이 시험한 결과다. 진밥을 만든다고 물을 더 넣는 분이 있는데 차라리 불림 기능을 더 활용하는 게 낫다.”
●10인용으로는 10인분을 다 만들어도 되나.
“만들 수야 있지만 일반적으로 10인용으로는 6~8인분 정도 하면 가장 맛있다. 그래서 4인 가족이 아침과 저녁 먹을 수 있는 10인용이 판매의 70%를 차지하는 것이다. 더 설명하면 1인분은 쌀 180cc가 기준이다. 밥솥을 처음 만들 때부터 적용한 기준이다. 그런데 갈수록 밥을 적게 먹는 추세이니 아무래도 바뀌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밥솥은 얼마나 쓸 수 있나.
“원래 10년 정도 사용해도 된다. 헐거워진 압력 패킹은 1~2년마다, 코팅이 벗겨진 내솥은 5~6년이 지나 교체하면 된다. ”
●밥솥을 쓰다 보면 왜 밥맛이 안 좋아지나.
“실리콘으로 만든 압력 패킹은 시간이 지나면 굳어진다. 그러면 틈이 생겨 증기가 새어 나간다. ”
●보온 상태의 밥은 어떻게 둬야 맛을 유지하나.
“내솥의 옆면에 닿지 않게 밥을 가운데로 동그랗게 모아 주면 밥맛을 최대한 유지시킨다. 밥이 가운데 모여 있을수록 주변의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보온에 적합한 온도가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